인물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에 대해 알아보자(개인적 견해)

뉴즈'S 2021. 5. 3. 21:13
728x90
반응형
SMALL

1. 글을 쓴 의도

스탈린을 들으면 처음 생각나는 말들은 잔인하다, 비인간적이다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물론, 어떤 경우에서든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이를 어느 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웅(카이사르, 진시황제, 항우, 수문제 등)이라고 칭송받는 인물들 가운데 많은 인물들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다수의 희생을 필요로 하고 적들에게는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스탈린도 거대한 이상이나 이념 등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다수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면 스탈린은 공산당을 이끈 위대한 인물 중 한명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 스탈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스탈린의 부정적인 모습에 감춰진 진면목을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구체적 행위와 스탈린에 대해 밝혀내보려고 한다.

2. 스탈린의 성장 과정

어릴 적 스탈린의 모습

스탈린은 18791221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이던 조지아의 고리에서 구두 제화공과 신기료 장사를 하던 아버지 비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재봉사이던 어머니 케테반 겔라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콜중독자에 술주정꾼인 아버지 비사리온은 자주 가족들을 구타, 폭행 했으며 불같은 성격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였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스탈린은 아버지를 경멸하고 증오했던 그는 주변의 친구들과도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했다.

따라서 오직 독서만이 그의 외로움을 달래는 길이었는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앙심 깊고 영리한 스탈린은 어머니의 기대와 바람대로 10살 때 교회 소학교에 입학했다. 기억력이 좋고 영민했던 그는 최고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다. 189416살에 그는 장학금을 받고 티플리스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스탈린은 신학교에서 민족주의적 사상에 빠졌고 카를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책을 접하면서 종교에 대한 열정을 버리고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였다.

동시에 제국주의와 종교적 질서에 대한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1900년 지하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지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0년부터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그는 카프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지만,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다. 이후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그가 존경하고 탐독하던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로 분당하게 되자, 스탈린은 보다 혁명운동에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던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1903년 말 스탈린은 볼셰비키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스탈린은 혁명가의 입지를 굳히고 사회민주당의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성장 과정은 스탈린이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살펴볼 내용의 글들은 스탈린의 정치 활동과 당시의 시대 상황 및 중요한 사건들을 연계하여 다룰 것이다.

3. 당시의 시대 상황

러시아의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냉혹하고 잔인하지만 독재자가 필요로 했다. 독재자 가운데 이반 4세는 차르(슬라브계() 여러 국가의 군주 칭호) 체제를 확정지었고, 표트르 1세는 러시아의 문명개화를 위해 독일네덜란드영국오스트리아를 유력, 유럽 문화를 시찰했으며, 러시아 자본주의화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는 서구 제국의 체제를 실현시켜나갔지만 내부의 봉건적 체제와 악습을 타파하지 못해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렇기에 대변혁이 요구되어져 왔는데,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들은 그럴만한 지도자가 되지는 못했다.

황제들을 살펴보면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을 추진 중 암살당했고, 알렉산드르 3세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보다는 암살을 두려워하여 강력한 탄압만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니콜라이 2세는 변혁을 이끌어나가기에는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 했다. 당시 러시아는 반정부 활동에 대해 거친 압박을 가했다. 이에,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주로 서유럽으로 망명해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런 가운데 지식인과 민중의 불만들은 나날이 쌓였다. 쌓였던 불만들이 과격한 정치운동으로 표출되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과격한 집단이 스탈린이 입부해있는 볼셰비키였다. 볼셰비키는 1903,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런던 대회에서 레닌이 보다 과격한 혁명을 주장하여, 비교적 온건파와 분열되었고 스스로를 부르게 된 별명이었다.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의 방침처럼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키면 평화적으로 정권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처음에는 과격한 활동과 이미지 때문에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 때, 19051월의 피의 일요일이라는 시민 대량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중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자 차르는 1030일 이후 근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도입하기로 한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가 황권을 포기하지 않게 되자 명목적인 개혁에 지나지 않았다. , 정부는 친정부적 대토지 소유 귀족들의 세력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결국 주요 인물이 되어야 했던 자유주의자와 온건개혁파는 입지를 잃어갔다. 반대로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발생한 러일전쟁과 제 1차 세계대전의 참패는 인명 피해와 경제난, 식량난을 야기하게 되었다. 이에 민중들은 반정부적 의식이 확산이 되었다.

그 중 군인과 노동자, 농민들의 불만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때 볼셰비키는 평화, 토지, 이라는 구호를 내세웠고 이에 가난에 허덕이고 힘들었던 민중들은 볼셰비키를 호응하게 된다. 특히, 볼셰비키는 반전 운동을 끊임없이 벌였고 이는 전쟁에 지친 민중들을 달래주고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19172월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에 군인까지 합류하면서 니콜라이 2세는 퇴위를 하게 된다.

레닌의 연설 당시 모습

니콜라스 2세의 퇴위 이후 케렌스키의 중심으로 온건파적인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가 전쟁을 계속하기를 선포하자 독일은 레닌과 지노비예프 등 볼셰비키의 주요 지도자들을 러시아로 돌아가게 하여 전쟁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레닌은 귀국 당시 소비에트(노동자, 농민 등 민중의 자치기구)로 모든 권력을!”이라고 주장하며 임시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임시정부는 볼셰비키가 최고의 위험으로 다가올 것을 알아차리고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코르닐로프의 우익 쿠데타가 때마침 발생하여 볼셰비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소비에트를 장악 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17117일에 무장봉기를 통해 임시정부를 무너트리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세우게 된다. 위의 내용은 왜 스탈린이 볼셰비키의 일원으로서 러시아의 혁명을 요구하게 되는가를 알려주는 배경이다. 그리고 이제 시대 스탈린 집권 당시 사건들을 중심으로 스탈린의 활동에 대하여 활동의 의미와 당시 스탈린의 활동 의의와 목적을 살펴보려고 한다.

4. 스탈린의 이야기

스탈린은 레닌의 신임을 얻어 새로 출범한 소련 정부의 민족인민위원직을 맡게 되었다. 스탈린은 여러 공화국들을 돌아다니며 소련 연방으로 통합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점차 당내 기반을 잡아가게 된다. 그리고 1921년까지 반혁명군과의 전투와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군대를 이끌며 많은 공로를 세우게 된다. 당시 정세는 정권 수뇌들의 노선 차이에 따라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 중 트로츠키파와 레닌과 스탈린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레닌은 스탈린을 당의 초대 서기장에 임명한다. 이를 계기로 스탈린은 상당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레닌의 뇌졸중 발작으로 고리키 마을에 칩거 생활을 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일을 스탈린에게 대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다 19241월 레닌이 죽게 되자, 스탈린은 트로츠키파를 숙청하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에, 삼두정치의 인물이었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스탈린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트로츠키와 연합하여 반 스탈린 노선을 펼치지만 1927년 당 중앙위원회를 통해 세 사람은 제명이 되었다. 이로써 스탈린의 독재체제가 시작이 된다. 거대한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소련을 자기의 뜻대로 하나씩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192815개년 계획은 스탈린이 농업 국가를 중공업 위주의 국가로 변환시키는 거대한 첫 걸음이었다.

이 계획은 소련의 경제를 키워 군사력을 강화시켜 대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농민들의 막대한 희생을 요구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부농(쿨락)으로 지목된 농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강제수용소에 보냈고 1929년에는 공동 분배되었던 농민들의 토지를 거두어 농업 집단화를 이루게 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레닌은 신경제정책을 수용하여 산업화와 농업 생산물의 공동생산 체제를 도입하였다.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그는 당시 소련 국내 생산품의 사용을 유도하였고, 수입품 억제 및 자국제품 수출 증대에 힘썼다. 산업화 과정에서 엄청난 실패와 기계 고장 등의 부작용들이 나타났지만 스탈린의 경제정책은 상당부분 효과를 거두어 수출력과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1928년에서 1940년 사이 강철은 5, 전력은 8, 시멘트는 2, 석탄은 4배 석유는 3배로 생산고가 증가했으며 철도를 포함한 수송수단은 4배로 늘어났다. 스탈린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상업 중심의 후진국을 급속도로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 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소련 국내외에서 폭넓게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제 악명 높은 정치적 숙청이 진행되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차례대로 제거되고 부하린, 르이코프가 처형되었다. , 트로츠키,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붉은 군대의 고위장교, 유대계, 독일계, 폴란드계, 한국계 등의 소수민족 사회주의자들, 나아가 일반 국민들까지 줄줄이 암살, 처형 되었다. 1933~1938년 사이 숙청된 사람의 수는 수백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되어진다.

이 부분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스탈린의 잔인하고 악랄한 모습이다.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의 성향을 나타냈는데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공존도 포함하고 있다. 스탈린은 서유럽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지원을 끊어가면서 서방국가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내세웠다. 이때부터,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스탈린의 대한 견해가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을 가장 놀라게 한 일은 19398월의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이었다.

불가침 조약

이에 대해 해외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이 빗발치자 스탈린은 국제 사회주의 연대조직인 코민테른의 대표자들을 대거 제거하여 코민테른을 소련 정부의 하부조직 비슷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 영국 등의 환심을 사려는 뜻에서 코민테른을 해체해 버렸다. 하지만 이는 소련의 영향권을 넓히고 사회주의의 영토를 확장시키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은 제국주의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갖춘 영토 확장일뿐이기 때문이다. 이후 폴란드 동부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루마니아의 일부를 병합하여 편입하였다.

그러나 19416월에 독일의 동방 팽창을 목적으로 한 바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었고 스탈린은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기습을 당하게 된다. 여기서 스탈린의 집권이 농민들에게 어떻게 비쳐졌는가를 보여주는 우스운 예가 있다. 그 예는 농민들이 오히려 독일군을 열렬히 환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스탈린의 모습은 그의 군사적 면모를 보여준다. 물론, 다른 나라의 도움에 힘입어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지만 스탈린 개인이 얼마나 노력을 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그 이야기는 전쟁 도중 스탈린은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일하며 토막잠을 잘 뿐이었는데, 한 번은 어느 부관이 안쓰러운 나머지 예정보다 한 시간을 더 자게 두자 스탈린은 깨어난 후 불같이 화를 내며 돼먹지 못한 인도주의자!”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이처럼 스탈린은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소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의 비인간적인 성격 역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스탈린은 전쟁의 피해를 내세우며 상당한 대가를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소련의 영향력은 동유럽의 대부분과 동부 독일, 그리고 북한과 몽골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스탈린을 위대한 승리자라는 칭호를 얻게 해주었다. 그 뒤, 냉전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사회주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그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스탈린이 집권하는 이 당시는 역대 러시아의 최대 국력과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45년 여름에 병사 파병을 동원하여 세계대전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지만 스탈린은 3000명의 병사 손실을 근거로 세계대전 승리에 기여했음을 주장하였다.

이런 대목도 스탈린의 세력이 얼마만큼 강했는가를 보여준다. 세계 대전 이후 스탈린은 스탈린 동지에게 오류는 없다”, “모든 것은 스탈린 동지의 지도에 따라등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19506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스탈린은 관여를 부정하였지만 김일성은 스탈린의 허가를 받고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김일성의 끈질긴 시도 끝에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331일 스탈린은 간부들과의 만찬 중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된다. 암살 의혹이 끊임없이 주장되어지고 있는데 스탈린의 죽음은 완벽한 독재체제였기에 스탈린이 죽자 스탈린체제도 같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5. 개인적 평가

스탈린에 대해 조사하고 살펴보면서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각이 났다. 사실, 이번 대선에 출마하게 된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아버지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말이 많이 나왔다. 대한민국을 독재로써 다스리며 많은 인명 피해를 입히고 자유를 억압했던 그의 평판은 나쁘다.

하지만 요즘 들어 박정희 같은 인물이 재집권하여 세상의 부조리함을 해결해주고 시정해 줄 수 있는 독단적인 인물이 나오기를 사람들은 원하는 것 같다. 이것은 참 모순적인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항상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를 원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것 같다.

이러한 관점들을 종합하여 비추어 볼 때 그 때 당시 독재자라고 불리고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았던 인물들은 오히려 후세에 가면 평가가 재해석 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그 당시의 사회적 인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우리들이 현재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는 위의 카이사르, 진시황제 등과 같은 인물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 더 나아가, 마키아벨리의 국가론에서는 군주는 자비로워야 하는가아니면 군주는 잔인해야 하는가에서 군주는 잔인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자비로움을 가진 군주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으며 원대한 이상을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 지도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 누구든지 한번쯤은 희생과 이상 속에서 갈등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소련이라는 나라를 최고의 국력을 보유하게끔 만들고 역대 최고의 위상에까지 드높인 스탈린을 단지 잔인하고 무자비한 비인간적인 특성만을 집중해서 보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그렇기에 스탈린에 대해 우리들은 당시 안정적이지 못한 소련의 초기 상황을 인지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시각을 다른 영웅들과 같이 적용하여 스탈린이라는 인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탈피하고 그가 이루었던 업적들을 기리고 어려운 환경들을 극복하고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인물로 재조명 받아야 한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