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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영웅_카이사르

뉴즈'S 2021. 4. 14.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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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앙부, 현재의 이탈리아, 테베레하반에 도시국가로서 일어나고, 후에 세계사상 미증의 대제국을 구축한 고대국가. 역사상으로 나타난 많은 국가나 제국 중에서 로마는 특별한 세계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로마에 대한 두 개의 속담,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가 상징적으로 나타내듯이, 세계사상 드문 긴 세월 동안 대제국을 건설하고, 그것을 유례없는 오랜 세월 동안 유지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로마를 중심으로 제국 각지에 방사해서 변경에서 인간이나 물자를 로마로 운반한 로마의 공도처럼, 이 이전의 선진문명을 흡수해서 그것을 다음 세대의 세계로 각각 전했다는 또 하나의 사실이 로마의 세계사적 위치를 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위대했던 로마가 번영·지속되기 위해서는 위대한 영웅들이 존재했다. 로마시대에 많은 영웅들이 존재했지만 로마 역사상 최고의 통치자라고 여겨지는 카이사르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카이사르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jacta est)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이런 어구는 누구나 한번쯤 은 들어봤을 것이다. 오늘날 까지 통용되어 오고 있 는 이 어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말한 명언들이다. 기원전 100년 로마에서 태어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혹은 시저라고 일컫는다. 유서 깊은 귀족 집안 출신 이었으나, 그 조상에는 유명한 정치가는 없었다. 그러던 중 BC60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 13두동맹을 맺고,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BC59년에는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은 콘술(console)에 취임하였다. 콘술로서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크 게 민중의 인기를 얻었다. BC58년부터는 속주 갈리 아의 지방관이 되어 BC50년까지 재임 중 이른바 갈 리아 전쟁을 수행하였다. 당시 갈리아 지역은 현재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켈트 족이 부족사회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 동안 갈리아의 평정만이 아니라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땅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 영국해헙을 건너 브리튼 섬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나 하였다.

 

8년간의 치열한 전투 갈리아 전쟁

전쟁의 발단 : 갈리아 전쟁은 BC58년에 시작해 BC51년에 끝난 로마 공화정과 갈리아 부족간의 전쟁이다. BC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아, 프로빈키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로마는 당시 갈리아의 독립 켈트족 부족국가 들과 교역 및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이두이족은 당시 세콰니족, 헬베티족, 게르만족의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다. 헬베티족은 대서양에 면한 산토니족의 영토로 이주하기 위해 프로빈키아속주를 지날 것을 카이사르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하이두이족과 세콰니 족의 영토를 지나려 했다. 이에 하이두이족이 카이사르에게 도움을 요청해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당시 갈리아의 지도

카이사르는 휘하에 4개 군단이 있었으며, 임지 중 두 곳 일리리쿰과 갈리아 나르보넨시는는 북방의 미정복지와 접경하고 있는데, 이곳의 독자적인 갈리아인들은 불안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었다. 카이사르는 새로이 두 군단을 조직하고, 처음에는 헬베티족을 다음으로 아리오비투스를 무찔렀으며, 겨울에는 세콰니족 영토로 군대를 물렸다.

 

임기 2년째에 카이사르는 처음보다 배가된 군사력을 갖추었다. 작년 카이사르의 군사 활동에 대응하여 갈리아 북동부의 벨가이 부족들이무장을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공격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였으며, 통합된 벨가이 동맹군과 한 차례 전투를 벌 이다 결판을 짓지 못한 뒤에 차차 각 부족을 하나씩 정복하였다. 아르모리카 정복은 카이사르가 베네티족을 해전에서 무찔르면서 완수하였으며, 젊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남서부의 아퀴타니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56년에 군사 작전을 종결하면서, 해안 저지의 모리니족과 메나피이족만 저항하였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마니아의 우시페테스족과 텡크테리족을 몰아냈으며, 이들을 추격하여 라인강에 가교를 건설하고, 게르마니아 영토에 진입하여 무력 시위를 하였으며 돌아올 때 다리를 해체하였다. 이듬해 그는 더욱 준비하고 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에 돌아왔으며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며, 트리노반테스족의 만두브라키우스왕과 동맹을 맺고, 그의 적인 카시벨라우누스를 항복시켰다. 그러나 갈리아에서 에부로네스족의 암비오릭스가 이끄는 반란이 퍼져 작황이 나빠지자 카이사르는 겨울 동안 군사 작전에 나서야 했으며, 전쟁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침공하다 카라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기원전 52, 갈리아 아르베르니족의 웨르킨게토릭스가 일으킨 반란이 또 한번 크게 번졌다. 웨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게르고비아 전투 등 여러 차례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무찔러 자신이 기민한 지휘관임을 입증하였으나, 알레시아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공들여 준비한 공성 작전으로 마침내 로마에 항복하였다. 이듬해에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났으나, 이로써 갈리아는 사실상 정복되었다.

 

암살로 인한 카이사르의 죽음

1인 지배자가 된 그는 각종 사회정책(식민·간척·항만·도로건설·구제사업 등), 역서의 개정(율리우스력)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권력이 한 몸에 집중된 결과, 왕위를 탐내는 자로 의심을 받게 되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주모자로 하는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BC 44315). 죽기직전 그는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신음을 뱉으며 그의 찬란하였던 일생을 믿었던 군신에게 마저 배신당하는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카이사르를 조사해 보며

 

역사상 로마만큼의 나라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로마는 위대한 나라이다. 그 위대한 로마의 사실상 첫 번째 황제로서 많은 업적들을 볼 수 있고 전쟁 중에는 용맹하고 다양한 진법을 사용하는 군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았을 때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우선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의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도 유쾌한 기분을 잃지 않다는 점이 있다. 그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 자비롭고 관용을 적들에게 베풀 줄 알고 모든 여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매력을 가진 남자임에도 틀림없다. 이 점은 정말 두고두고 닮고 싶은 점이다. 사실 조사를 하기 전에는 카이사르는 그저 전쟁만 좋아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사를 하면 할수록 카이사르의 매력은 나를 사로잡아 가고 있다. 카이사르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있는데 그 이유를 살짝 알 것만 같았다.

 

영웅이자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군인인 카이사르는 시대 상황이 만들어 준 시대의 풍운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이 아닐지라도 카이사르라는 그 이름은 어떤 식으로든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다. 위대한 빚쟁이라고 불리었을지도 모르기도 한다. 어쨌든 카이사르가 앞으로 내 인생의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지만 나는 카이사르를 존경하고 그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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